HOME > 우리나라재해환경 >
 
수해(가뭄과 홍수)에 대한 역사적 기록
 
    ※ 여기에서 언급된 내용은『물과 미래(건설교통부, 한국수자원공사, 2007)』에서 발췌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고대로부터 우리나라에는 한해와 수해의 연속적인 내습으로 농업생산에 심한 타격을 주어왔다. 수해는 그나마 국지적인 희생이 있을지라도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의 풍작을 가져오기도 하나, 수리시설이 부족하였던 시대에 한해는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한해는 자연의 재해 중 그 피해가 매우 크면서도 그것이 직접적으로 인명에 피해를 주는 경우가 드물어 경시되기 쉬우나, 가뭄이 극심한 때에는 곧이어 기근이 뒤따르기 때문에 고대에는 한해가 더 중시되었다. 한해를 당하여 기우제를 지내거나 메뚜기 떼가 창궐한 경우에도 기도를 드리는 의식이 있었고, 재해가 심하면 왕 자신이 근신한 경우도 있었다.
삼국사기를 통해 삼국시대의 가뭄과 굶주림에 대한 기록을 보면 매우 심각한 일들이 있었다. 가뭄은 한(旱), 대한(大旱)으로 표시되고 그 시기도 명기되어 있다.
가뭄의 정도는 그것에 뒤따르는 굶주림의 상태로 표현되어 있는데, 대한이 있으면 그것에 따르는 굶주림은 기(飢)와 기(機)로 표시되어 있다. 구체적인 가뭄과 굶주림의 상태를 보면 가장 가벼운 정도일 경우 흉년이 들어 도둑이 많았으며, 심한 가뭄에는 나무껍질로 연명을 했다. 더 심한 기근에는 자식을 팔았고, 가장 극심했던 기근에는 서로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같은 상태는 가뭄과 굶주림이 얼마나 심했던가를 알려준다.
 
  삼국시대 ∼ 조선시대
 
연도 주 요 내 용
삼국 및
통일신라
「고구려」
45년 (민중왕 2년) 5월에 동쪽지방에 大水가 지고 백성들이 기근에 빠지므로 창곡을 풀어 이를 구제하였다.
535년 (안원왕 5년) 국남지방 (평양 이남지방)에 대홍수로 200여명이 사망하였다.
「백 제」
116년 (개로왕 40년) 6월에 큰 비가 10일 동안이나 내려 한강의 물이 불어 넘치고 민가가 헐어졌으므로 7월에 왕은 유사에게 명하여 수해를 입은 田地를 보수하게 하였다.
248년 (고이왕 15년) 봄여름에 한재가 들고 기근이 삼하므로 왕은 창고를 풀어 이를 진휼하고 1년 동안 세금을 감면시켰다.
506년 (무녕왕 6년) 봄에 병이 돌고 3월부터 5월에 이르기까지 비가 오지 않아 천택(川澤)이 모두 마르고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왕은 창곡을 풀어 이를 구제하였다.
「신라 및 통일신라」
226년 (내해왕 31년) 한재로 인하여 백성들의 기근이 심하므로 왕은 창곡을 풀어 이를 구제하고 10월에는 내외의 감옥 죄수들을 다시 살펴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492년 (소지왕 14년) 봄, 여름에 旱災가 들었다. 이에 왕은 스스로 정사를 반성하고 아울러 먹는 음식을 평소보다 감하였다.
589년 (진평왕 11년) 7월에 국서지방에 큰 홍수가 져 민가 30,360호가 표몰되고 200여명이 죽어 왕은 사신을 파견하여 수재민을 구하였다.
628년 (진평왕 50년)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 비를 빌었다.
707년 (성덕왕 6년)> 정월에 백성들이 많이 굶어 죽어 사람들에게 하루에 조곡 3말씩을 7월까지 지급하였다. 2월에 죄수를 대사면하고 백성들에게 5곡 종자를 주었다.
고려시대 1132년 (인종 10년) 7월에 경성에 기근이 들어 곡물이 귀하고 물자는 천하여 은병 1척 값이 쌀 5석(碩)이며, 소마 1필의 값이 1석이고, 송아지 1마리의 값이 4두(斗)요, 포 1필의 값이 6승(升)이었으며 길거리에는 굶어 죽은 자가 잇달았다.
1186년 (명종 16년) 물난리로 민가 100여호가 떠내려갔고 사람이 1,000명이나 죽었다.
1360년 (공민왕 9년) 4월에 경상도와 전라도의 기근으로 죽은 사람이 인구의 반이나 되었으며, 죽어서 길에 버려진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고 길 가득히 죽은 어린아이들이 버려져 있었다.
조선시대 1485년 (성종 16년) 6월에 한해대책을 논하고 미결로 남겨놓은 소송의 조속한 해결을 지시하고 중앙과 지방에 금주령을 내렸다. 또 8도에 진휼사를 파견하였으며, 각도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를 풀어 도토리를 줍게 하였다.
1584년 (선조 17년) 해주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흙을 파먹었다.
1781년 (정조 6년) 6년 여름에 경기 500리에 큰 가뭄이 계속되어 논밭이 갈라지고 영응 미진함에 성상께서 스스로 책하여 구언하고 친히 우단에 병직을 덮고 기도하고 어의와 면류관이 저녁이슬에 젖어도 앞일을 위하여 아침까지 앉아 기다리니 가마는 뒤에 머물렀다.
1823년 (순조 23년) 6월에 낙동강 대홍수로 3,800여호 수가 EJ내려 갔으며,전국적으로 7,671호나 EJ내려 갔고, 압사자가 293명에 달했다.
1839년 (헌종 5년) 8월 대홍수로 전국적으로 165명이 사망하고, 민가 7,350호가 파손 또는 유실되었다.
 
  일제강점기
 
연도 주 요 내 용
가 뭄 1924년 5월 15일부터 7월 11일까지 57일간 가뭄이 계속되어 제주도에는 풀조차 나지 않았음 7월 28일부터 9월 6일까지 41일간 중부 이북에 가뭄이 계속되었으며, 일제는 좁쌀 1,270천석을 한반도로 수입해 옴.
1929년 4월 26일부터 5월 25일까지 인천을 비롯한 중부지방에 가뭄이 들었고, 목포에서는 5월 12일부터 34일간 비가 내리지 않았음.
1939년 3~4월 봄가뭄에 이어 광주지방에서는 5월 12일~6월 15일, 7월 1일~7월 23일까지 무강수일을 나타냄. - 목포지방도 5월 12일 6월 20일의 40일 가뭄을 나타내고, 전국적으로 7~8월의 가뭄으로 쌀 생산이 평년작의 40% 감소를 나타냄        
1942년 임오년 가뭄으로 칭하는 이 해부터 3년간 거듭된 한발로 3년 거듭 흉작을 나타냈으며, 주민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했으며, 일제도 양곡배급을 실시했으나 전 국민이 기근을 면치못함.
수 해 1920년 7월 19일 경남 산청에 400㎜의 호우가 내렸고, 7월 22일 심랑진 수위가 최고수위(8.09m)에 도달, 37,829hark 범람하고, 토지 21,482ha 유실 또는 매몰, 가옥 7,170호 유실붕괴, 익사자가 1,100명으로 조사됨, 이해1년간 전국에 걸쳐 1,264명의 사망자가 발생
1925년(을죽년) 7월 6일부터 20일까지 15일 동안의 장마로 전국에 걸쳐 1년간 강우량의 80%에 해당하는 700~970㎜ 비가 짦은 기간에 내림.  
밀양, 김제 등의 제방붕괴로 2,000명이 행방불명된 것으로 나타남.
17~18일에는 중부지방과 서해안의 폭우로 서울에서 29,229명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경기도에서만 356명이 사망. 
이해 장마와 8월의 태풍으로 517명이 목숨을 잃었음. 
1934년 7월 23일부터 영산강일대를 비롯한 삼남지방 수해로 영산강유역에서만 7명이 죽고, 농경지 1,865ha가 유실·매몰되었으며, 25,128ha가 침수됨
1936년 강원도에서만 961명이 목숨을 잃는 등 이해 홍수로 인한 사망자는 1,916명에 이르렀고, 농경지 338,835ha가 침수됨.>
 
  재해극복을 위한 선조들의 지혜
  기상관측 기록
    - 역술로 일월식을 통계 처리하여 밝혀내는 계산법이나 오행성의 운행변화는 국가 간은 물론 한 나라 안에서도 극비로 하여 왕의 관리 하에만 두게 마련이었다.
- 백제에서는 천문학에 지식을 구비한 사람이 많아 성왕 23년(서기 545년)에 역박사 고덕왕계를 일본에 보냈고, 서기 602년 승려 관혁이 역서와 천문지리서를 일본에 전파했으며, 신라의 첨성대도 백제의 아비지가 선덕여왕 16년(서기 647년)에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 정밀하고 과학적인 천문예측은 조선시대 세종 때 이으러 가능해졌다. 세종 14년 정인지, 정교, 정흠지에 명하여 칠정산내편을 편찬케 함으로써 비로소 서울의 북위가 38도이며, 1년의 길이를 정확히 관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표준시를 정하고, 세종15년에 일월성진의 위치를 표기하는 간표로서 혼천의를 설치함으로써 천문관측이 실용화 되었다.
- 이듬해 자격루가 창제되어 수시·역시의 표준사용이 반포되었다. 뿐만 아니라 지하침수심을 계측하여 지역별 강우량을 측정 기록케 한 것이 후일의 측우기와 수표를 발명케 했던 동기가 되었으며, 이는 곧 세계 최장기 측우기록인 경성출수표를 낳게 되었다.
 
  제언 및 수리시설 수축
    - 농경사회에서 한·수해를 미연에 다스리면서 벼농사를 짓기 위해 일찍부터 제언(堤堰)을 비롯한 수리시설을 한 기록을 볼 수 있다.
- 일본의 고사기 응신천황 7년 9월 초 백제인들의 수리토목기술이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 삼한시대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제방으로는 김제의 벽골제, 상주의 공검지, 의성의 대제지,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지 등이 있다.
- 고려시대에도 장정과 병졸을 동원하여 구제방을 개축하거나 신제언을 증충하는데 총력하였음을 기록으로 짐작할 수 있으나, 이러한 수리시설도 답작 (沓作)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 조선 태종 15년(1415년)에 있었던 벽골제 수축으로 이때에 동원된 1만명이 지방관찰사와 파견된 경차관 하에서 이룬 역사는 岸長이 77,000보, 수문이 5개, 수리면직이 9,840결이나 되었다고 한다.
- 그러나 세종 2년 8월에 눌제오 벽골제가 홍수로 파괴되었듯이 당시의 수리기술은 우리나라의 홍수특성을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에 머물고 있다.
 
  스크랩 1회
작성자 : 관리자(admin)
등록일 : (최종수정 : )
조   회 : 2437
스크랩 : 1
덧글 0 | 엮인글(트랙백) 0


 
Copyright ⓒ DPSI(㈜방재안전기술원).Co.Ltd. All Rights Reserved